Venture Opinion

미국 벤처 캐피탈의
역사 및 시사점

한국벤처투자 조사분석팀  배승욱 연구위원

Venture Opinion

미국 벤처 캐피탈의
역사 및 시사점

한국벤처투자 조사분석팀  배승욱 연구위원

‘벤처 오피니언’은 벤처생태계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선정 후
심도 있는 조사 및 분석을 통해 도출된 인사이트를 매월 제공합니다.

본문의 견해와 주장은 필자 개인의 것이며,
한국벤처투자(주)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01

서언

미국은 20세기 초 가장 먼저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이 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벤처캐피탈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18년 전 세계 벤처캐피탈 투자 금액 2,550억 달러 중 미국 벤처캐피탈 투자 금액은 약 1,320억 달러로 전 세계 벤처캐피탈 투자의 약 52%를 차지하고 있으며1), 2019년 6월 현재 전 세계 유니콘 기업 약 367개 중 49%인 179개가 미국의 기업들이다.2) 이렇듯 전 세계 벤처캐피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벤처캐피탈 시장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대한 시사점을 얻는 일은 현재 급성장 중인 벤처캐피탈 시장을 가진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의 벤처캐피탈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제2장에서는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살펴보고 제3장에서는 미국의 벤처캐피탈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결론에 갈음하려고 한다.

1) KPMG, “Venture Pulse Q1 2019 – Global analysis of venture funding”, 2019. 4. 11.
2) CB Insights(2019년 7월 2일 기준).

‘벤처 오피니언’은 벤처생태계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선정 후
심도 있는 조사 및 분석을 통해 도출된 인사이트를 매월 제공합니다.

본문의 견해와 주장은 필자 개인의 것이며,
한국벤처투자(주)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01

서언

미국은 20세기 초 가장 먼저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이 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벤처캐피탈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18년 전 세계 벤처캐피탈 투자 금액 2,550억 달러 중 미국 벤처캐피탈 투자 금액은 약 1,320억 달러로 전 세계 벤처캐피탈 투자의 약 52%를 차지하고 있으며1), 2019년 6월 현재 전 세계 유니콘 기업 약 367개 중 49%인 179개가 미국의 기업들이다.2) 이렇듯 전 세계 벤처캐피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벤처캐피탈 시장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대한 시사점을 얻는 일은 현재 급성장 중인 벤처캐피탈 시장을 가진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의 벤처캐피탈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제2장에서는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살펴보고 제3장에서는 미국의 벤처캐피탈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벤처캐피탈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결론에 갈음하려고 한다.

1) KPMG, “Venture Pulse Q1 2019 – Global analysis of venture funding”, 2019. 4. 11.
2) CB Insights(2019년 7월 2일 기준).

02

미국 벤처캐피탈의 역사

❶ 벤처캐피탈 출현 전 모험 자금(1880년~1929년)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기술 혁신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880년부터 1900년까지 과학 기술기반 회사들이 기업 내부에 R&D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들은 기업에 필요한 새로운 제품과 생산 공정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 당시 미국 내에서는 기업연구소 설립뿐만 아니라 창업자(발명가)에 의한 발명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은행이 점점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으로 변모하면서 창업자에게 자금이 원활히 공급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창업자는 공식적인 은행보다는 가족, 친구, 성공한 기업인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으며 발명을 계속했다. 실제로 미국 중서부 지역, 특히 디트로이트에서 초기의 자동차 산업에 자금을 지원한 주체는 은행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성공한 기업인이었으며, 금융회사들은 초기 단계의 자동차 창업자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것을 주저했다.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고 통합되는 동안 또 다른 산업인 항공 산업이 출현했는데, 항공 산업이야말로 벤처캐피탈 산업의 탄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항공업 창업자는 자동차에 사용된 부품에서 비행기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으나 점차 비행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정교한 제품으로 진화했다. 그 후 항공업이 항공우주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정부는 군용 항공 산업에서 정교한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들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수십 년 동안 항공 분야에는 주로 부유한 개인이 투자했다. 이들은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항공업을 유망한 투자 분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비행으로 유명한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는 카보츠(Cabots),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어거스트 버몬트(August Belmont), 러셀(Russell), 프레드릭 알제(Frederick Alger)와 같은 동부의 기업인들과 금융가들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항공 분야의 창업자들은 자비로 사업을 시작했다. 비행에 열망을 품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것을 계기로 지속적인 기술의 변화에 따른 성장 가능성을 믿고 기존에 다니던 항공 회사를 퇴사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당시 항공 분야에서는 현대적인 벤처캐피탈과 유사한 기관들의 투자 실험이 있었는데 1926년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은 250만 달러의 펀드로 항공 분야의 과학 기술 연구를 장려해 민간 항공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었다. 1927년 이 펀드는 미국 최초의 항공사인 웨스턴 항공사에 15만 달러를 대출(Loan)해주었는데 항공사의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1년 안에 모두 상환됐다. 이 펀드는 계속해서 항공 산업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투자됐고, 어떤 측면에서 최초의 벤처캐피탈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3) 미국 벤처캐피탈의 역사 부분은 “Martin Kenney, ‘How venture capital became a component of the US National System of Innovation’, 2011.”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로 꼽히는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Ⅰ)의 손자인 로렌스 록펠러(Laurance S. Rockefeller)는 벤처캐피탈과 같은 투자에 관심이 컸다. 그의 첫 투자는 1938년 에디 리켄베커(Edie Rickenbacker)가 설립한 Eastern Airlines사에 대한 차환(Refinancing)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 후 1938년 로렌스 록펠러는 Glenn L. Martin Aircraft 회사의 디자이너였던 J. S. 맥도넬(J. S. McDonnell)에 투자해 세인트루이스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기 직전인 1940년 로렌스는 그의 아버지에게 신탁기금에서 석유 주식의 일부를 매각할수 있도록 요청해 지속적으로 다양한 항공 산업 회사에 투자할 수 있었다. 특히 군대에 비행기를 공급
하는 군 항공 산업 관련 회사에 투자해 큰 수익을 올렸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항공 산업은 놀라운 성장을 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대형 항공업체들은 물론 Hewlett Packard, Raytheon 등 그 당시 소규모 전자 업체들도 덩달아 큰 수익을 냈다. 당시 군 항공기의 속도와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 항공기에 더 정교한 기술을 요구했으며 기술이 향상된 항공기는 매우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이 시기 특수한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정교한 기술력을 가진 소규모 기업체들의 제품들이 연방 정부로부터 매우 높은 가격으로 구매돼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으며 특히 전자제품이 관련된 항공 및 항공 관련 산업은 초기 모험 자본의 주요한 투자 분야가 됐다.

❷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시작으로 미국 금융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재편됐다. 1930년대 대공황 관련 의회 청문회에서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 IPO와 관련해 고의로 대중에게 정보를 숨겼다는 사실을 포함해 많은 문제점이 발견됐는데, 이에 따라 의회는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The Glass–Steagall Banking Act)을 제정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류함으로써 상업은행 업무를 모험자본시장으로부터 분리했다. 또한 1934년 의회는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이하 SEC)를 창설해 주식 시장 조작 및 내부자 거래 등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SEC에 부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주요한 채널을 중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경제 정책의 건강한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결과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이 문제는 당시 정치적·이념적 문제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옹호하는 정치인은 정치적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소기업 자금 지원 공약을 제시했지만 연방정부의 경제 개입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의 반대에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이러한 논쟁은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지만 아직까지 벤처캐피탈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MIT 총장 칼 콤프톤(Karl Compton)과 Raytheon를 설립한 MIT 엔지니어인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등 엘리트 학자들은 신기술을 상용화하는 중소기업이 뉴잉글랜드 지역과 미국 경제 회복의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MIT에서 개발되고 있는 신기술들을 상용화하도록 새로운 스타트업들을 장려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36년 미국 경제가 대공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주식 시장과 경제가 다시 한 번 급락하면서 정부와 학계에서는 중소기업에 어떻게 자금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1938년 조셉 니콜슨(Joseph Nicholson)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서 기존의 금융기관 및 정부기관도 중소기업 금융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없으며 새로운 자금 공급 방안이 필요함을 주장했고, 1939년 보스턴의 링컨 필린(Lincoln Filene)은 은행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정부 보조금의 대가로 은행과 기업이 출자한 민간 자금을 활용해 지역 산업개발신탁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같은해 로건부히스(Logan Voorhis)는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예금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중간 신용은행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더 나아가 1939년 후반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소기업에 대한 장기 대출에 대해 원금의 80%까지 연방보험으로 지원하는 방안과 함께 중소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를 하고 그들에게 은행 대출을 보증하기 위한 ‘연방산업대출회사(Federal Industrial Loan Corporation)’를 설립하려고 했다. 이렇듯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이어졌다.

당시 정부와 학계뿐만 아니라 투자은행들도 중소기업에 새로운 자금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중소기업들의 성장 잠재력이 제한적이고 전체 수수료가 적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1938년 실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상원위원회에서 E. I. Nemours du Pont Corporation의 회장인 라못 뒤 퐁(Lammot du Pont)은 “미국이 다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이라고 보고했다. 이 위원회에서 벤처캐피탈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다. 1938년 1월 1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에서 라못 뒤 퐁의 벤처캐피탈이라는 문구를 채택해 벤처캐피탈을 “수익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지 않은 투자”로 정의했다.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은 1938년 1월 24일자 사설에서 “미국 경제에서 벤처캐피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관은 없는데 그 이유는 벤처 정신을 가지고 돈을 빌려줄(borrow) 수 있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논평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은 “빌려주는(borrow)”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벤처캐피탈에 대한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벤처캐피탈’이라는 용어가 금융권에 매력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1939년 10월 9일 샌프란시스코 증권회사인 Dean Witter & Company의 장 위터(Jean Witter) 회장은 투자은행협회 연설에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새로운 기업 창출과 확장을 촉진할 새로운 형태의 자본인 벤처캐피탈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 이득에 대한 큰 폭의 세금 감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 위터(Jean Witter) 회장은 벤처캐피탈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실험 단계에 있는 사업을 위해 공모로 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초기 사업에 대한 자금 조달은 위험에 익숙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며 새로운 사업의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누가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새로운 기관을 어떻게 만들고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지만, 특별히 벤처캐피탈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다가오는 실업 문제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벤처캐피탈의 중요성을 강조한 ‘Massachusetts Prepares for Tomorrow’라는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면서 다시 한 번 벤처캐피탈이 중소기업의 자금 공급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의가 진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의 10년간의 논쟁 후에도 중소기업 자금 지원에 대한 논의는 적절한 방안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만 계속되었다.

❸ 벤처캐피탈 회사의 출현(1946년 ~ 1950년대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며 기술적으로 강한 국가로 만들었다. 레이더와 원자폭탄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와 이익에 대한 믿음이 치솟았다. 1945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당시 카네기재단 이사장인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에게 새로운 기업과 산업의 형성을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과학 기술 지식이 어떻게 전후(戰後)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네바 부시는 그의 보고서인 <끝없는 개척자(The Endless Frontier)>에서 전후 경제의 핵심은 지속적인 과학 기술에 대한 연구에 달려있다고 기술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과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규모 기술 기반 중소기업에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가 있다는 믿음을 표명했다. 과학적 연구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부시의 보고서는 보스턴 지역의 학계 및 사업가에게 대학에서 새로운 연구를 사업화해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지역 경제 회복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빠르게 발전한 기술들이 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일례로 1938년 설립된 신생 회사였던 Hewlett Packard는 1941년 10만 6,458달러의 매출을 달성했고, 1945년에는 연간 매출액이 100만 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기술 기반 창업의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고위험 기업에 투자하거나 기존 기업의 확장에 자본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몇몇 선구적인 벤처캐피탈 회사가 출현했다. 보스턴에서는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칼 콤프톤(Karl Compton), 랄프 플랜더스(Ralph Flanders)와 하버드 경영대학원 조지 도리오(Georges Doriot) 원장 등 기업 및 대학 지도자들이 American Research and Development(이하 ARD)라는 최초의 벤처캐피탈을 결성했다. ARD는 투자신탁 및 보험회사 등의 기관 투자자, 그리고 초기 공모주 발행을 통해 주로 자금을 조달했다. 자금을 모집한 이후 ARD는 중소기업에 자금을 직접 투자하기 시작했고, 투자 대상 기업 중 다수는 MIT에서 스핀오프해서 나온 기업들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로렌스 록펠러(Laurance Rockkefeller), 존 휘트니(John H. Whitney), 그리고 휘트니(Whitney)의 여동생 조안 휘트니 페이슨(Joan Whitney Payson)은 뉴욕에 각각 세 개의 패밀리(Family) 펀드를 설립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이들 벤처캐피탈 개척자들은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경영 자문을 하는 등의 지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기존의 모험 자본은 대부분 자선적인 차원에서 큰 손실을 동반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로부터 수익을 낼 수 있는 상업적인 조직으로 만들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다.4) 세 개의 패밀리 벤처캐피탈은 조합(Partnerships)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가족들의 자본으로만 이루어졌고, ARD는 주로 공모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했다. ARD의 초기 투자자들 중에는 기관투자자인 투자신탁, 대학기금, 보험 회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훨씬 후에 사모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에 LP 투자자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됐다. 1947년 Rockkefeller 벤처캐피탈은 항공, 주택, 전자 분야에 투자를 했으며, 방사성 동위원소, 멕시코 산업, 목재나 플라스틱을 사용한 새로운 공정, 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투자했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들 4개 벤처캐피탈들은 간헐적으로 다른 투자자가 참여해 벤처투자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그 당시 다른 투자자들은 거의 이 시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3개의 패밀리 벤처캐피탈이 그들의 수익을 공개하지 않았고, ARD는 단지 몇 번 작게 성공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4) 벤처캐피탈은 어떻게 자본을 조달해야 하는가? 투자 수익을 기다리는 동안 일상적인 운영 지원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투자 대상 및 투자 분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술, 소매, 제조, 부동산 등이 위험에 상응하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 벤처캐피탈 기업을 위한 최상의 조직 구조, 벤처캐피탈 전문가를 위한 최상의 보상 방법, 포트폴리오 회사와의 상호작용을 관리하는 방법 및 개별 벤처캐피탈 투자자에게 보상하는 방법 등 많은 운영상의 고민이 있었다.

❹ 벤처캐피탈산업의 출현(1950년대 후반 ~ 1970년대)

195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벤처캐피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 1957년 10월 우주 개발 경주에 불을 붙인 스푸트닉(Sputnik; ‘동반자’라는 뜻의 러시아어, 구소련(USSR)이 초창기에 개발한 인공위성) 발사가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에 트랜지스터, 컴퓨터, 그리고 다양한 과학기구와 같은 경량 부품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발생시켰다. 이에 따라 1958년 미국 국방부는 국방 관련 연구, 특히 항공우주, 전기공학, 컴퓨터 과학 분야의 막대한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진국방연구사업청(The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dministration, 이하 DARPA)을 설립했다. 미 국방부는 기존에도 대학과 기업에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DARPA는 기존과는 다른 규모로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스푸트닉 발사로 인해 생겨난 미 국방부의 투자는 두 가지 면에서 벤처캐피탈 산업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투자로 인해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첨단 전자제품의 시장이 크게 성장해 관련 중소기업의 이익이 대규모로 늘었으며, 둘째, 대학 전기공학부에 대한 연구비가 대폭 증가해 1960년대에 많은 대학에서 독립형 컴퓨터공학과가 설립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컴퓨터공학과의 학생들이 새로운 발명과 기술을 만들어 냈고 이들이 졸업하자마자 연구자, 기술 중심의 스타트업 임원 및 기업 창업자로 성장하게 됐다. 이로 인해 컴퓨터 부품 및 소프트웨어 기술이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발견은 실리콘 기반 반도체가 약 2년마다 처리 능력 가격 대비 2배의 성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발견이었다(Gordon Moore’s Law). 이것은 성능이 뛰어나지만 저렴한 컴퓨터의 생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발전이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모듈화의 증가도 새로운 부품 회사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고, 시스템 수준에서는 기업가들이 기존의 부품으로 새 컴퓨터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55년 로스앤젤레스 기반 회사인 Beckman Instruments 설립자인 아놀드 벡맨(Arnold Beckman)이 팔로알토(Palo Alto)에 있는 스타트업 Shockley 반도체에 투자한 것은 실리콘밸리의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후 Shockley와 엔지니어들 간의 불화로 인해 엔지니어 중 8명은 Fairchild 반도체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들은 IBM의 셔먼 페어차일드(Sherman Fairchild)로부터 3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Fairchild 반도체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어 급성장하였으며, 실리콘밸리 지역의 많은 잠재적 창업자들에게 창업 성공의 열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Fairchild 출신의 기술가들은 이후 계속해서 회사들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벤처캐피탈사들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은 기업가들과 투자자들 모두에게 상당한 자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Fairchild는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당시 서부 지역의 관행과는 다르게 직원들에게 스톡옵션(Stock Option)을 부여한 것이다. 스톡옵션은 종업원들의 이익을 기업가들과 벤처투자자들의 이익과 균등하게 배분하는 데 기여했으며 최고의 엔지니어들과 임원들이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신생 창업 기업의 스톡옵션은 벤처캐피탈에 의해 추진되는 새로운 경제 사업 모델의 핵심 부분이 됐다.
이후 벤처투자는 눈부신 투자 수익을 올렸는데, 첫 번째 성공은 1958년 위성사진 촬영용 정보 처리 시스템을 제작한 Itek 회사에 대한 Rockefeller Brothers, Inc(이하 RBI)의 투자였다. 1958년 RBI는 Itek 주식을 주당 2달러에 매수해 1961년 5월까지 장외시장에서 주당 60달러에 매도했다. 1957년 ARD는 MIT 링컨 연구소의 자회사인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이하 DEC)의 지분 70%를 대가로 7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1966년에 DEC가 IPO를 할 당시 ARD의 DEC 지분 가치는 3850만 달러(연평균 100% 수익률)로 향상했다. 곧 파산한 Itek과는 다르게 DEC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1970년에는 기업가치가 3억 5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DEC는 벤처캐피탈이 향후 미국 경제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존 학자들의 주장을 입증했다.

초기 벤처캐피탈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국방연구개발기금(Defense R&D Funding)이라고 볼 수 있다. 국방연구개발기금은 특히 기술 기반 창업 기업의 성장을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형성된 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국방부는 혁신적인 기술 제품의 구매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컴퓨터 기술 혁신을 위한 민간 벤처캐피탈의 역할이 증가됐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반도체 시장에서 국방부의 구매율이 전체 시장의 20%에서 30% 사이였으나 1978년에는 13%로 떨어졌고 점차 민간 벤처투자로 대체됐다. 또한 1960년대에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은 대규모 비용이 들어가는 계약을 종결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방위산업 시장은 신생 기업과 벤처투자자들에게 매력을 잃게 됐다.

SBIC(The Small Business Investment Corporations)

중소기업을 지원하려는 정부와 의회의 의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됐다. 1953년 의회와 행 정부를 장악한 공화당은 대공황 시대의 재건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 폐쇄에 대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중소기업부(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이하 SBA)를 신설했다. 미국 경제가 불경기로 빠져들고 중간선거가 다가오면서 공화당 의원들은 선거 결과를 걱정 했고 1958년 초 상원 다수당 지도자인 린든 존슨(Lyndon Johnson) 의원이 중소기업의 자금 대출 요구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SBIC’를 설립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SBIC는 중소기업에 직접 연방 자금의 대출을 제공하는 대신 민간 투자자인 SBIC에게 대출을 보증하는 형태로 설계됐으며 정부는 SBIC에 인센티브와 감독을 제공했지만 자금 지원을 받을 중소기업에 대한 어떠한 결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SBIC 지원자는 면허를 받기 위해서 최소한 15만 달러의 납입 자본금을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연 5%의 이자율로 15년 대출과 20년 후순위 채권의 형태로 최대 200%의 레버리지(Leverage)를 받을 수 있었다. SBIC의 자본이 15만 달러 이상일 경우에는 레버리지가 점차 감소하게 되어 작은 규모의 벤처캐피탈들이 SBIC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초기 SBIC 법률은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SBIC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요구했지만 이는 중소기업이 받은 자금을 투자자에게 환급하게 되는 꼴이라 곧 철회됐다. 투자자들로부터 포트폴리오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SBIC가 포트폴리오 기업의 20% 이상을 소유하는것 또한 금지됐는데 이는 SBIC가 투자한 기업에 영향을 행사하는데 한계가 됐다. 즉 SBIC는 이 규정으로 인해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추가 자금을 요구하는 경우 후속 투자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SBIC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했다. 먼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SBIC가 있었는데 이들이 선택한 투자 분야는 부동산과 소매점부터 기술 회사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SBIC 중에는 최소 자본 금액을 기초로 설립된 곳도 있었다. 둘째, 주식 공모를 통해 그들의 자본을 조달하는 형태의 SBIC가 있었다. 이러한 SBIC는 수는 적지만 전체 SBIC 자본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마지막 유형으로는 금융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SBIC로, 이는 상업은행들이 글래스-스티걸법(The Glass–Steagall Banking Act)상의 투자 금지를 우회해 투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초반에는 많은 벤처투자자가 SBIC 프로그램의 개시를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곧 여러 가지 문제점이 부각됐다. 가장 큰 문제는 45만 달러의 자본금(최소자본금 15만 달러+2배의 레버리지)밖에 모집할 수 없어 중소기업에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당시 가장 작은 SBIC의 경우 정규직 직원을 단 한 명도 고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게다가 SBIC의 한정된 자본은 포트폴리오 회사에 대한 후속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SBIC의 레버리지는 매력적으로 인식됐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기술 기반 중소기업들의 성공으로 인해 많은 SBIC가 설립됐다. SBIC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면서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전자제품에 투자한 SBIC의 빠른 성공으로 인해 단시간에 벤처캐피탈산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였다. 벤처캐피탈저널이 수집한 자료5)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63년까지 SBIC는 민간 벤처캐피탈보다 3배 많은 자금을 중소기업에 공급 했다고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 투자 격차는 상당히 줄었으며 SBIC가 대중에게 주식을 발행 하고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를 상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활발한 주식 시장상황은 지속되지 않았다.

1962년 주식 시장의 하락으로 일부 상장 SBIC의 주가는 장부 가격의 50% 이하로 폭락했으며 SBIC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 Hayes and Woods의 보고서6)에 따르면 SBIC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은 제조업 투자 지원이었지만, 주식 시장의 어려움으로 인해 가장 인기 있는 투자 분야는 1위 부동산, 2위 소매점, 3위 전자제품, 4위 컨설팅, 5위 개인 서비스 순이었다. 결정적으로 SBIC가 실패했던 이유는 부동산과 소매점의 투자조차 실패율이 높았다는 점이었다. 주식 시장의 하락은 상장 SBIC가 자발적인 청산으로 SBIC 프로그램을 종료하게 했고, 1972년까지 50개의 상장 SBIC 중 36개가 청산, 합병 또는 전환됐다. 그리고 1980년대에 해당 SBIC의 대부분이 시장을 떠났다.

은행이 설립한 SBIC도 전문적으로 운영되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은행은 SBIC를 관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중소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인력 및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은행의 지원을 받는 SBIC를 통한 조사에서 응답자(전체 SBIC의 15%)의 27%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알았다면 SBIC를 결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답할 만큼 상당한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던 곳은 소규모로 결성된 SBIC였다. 기본적으로 자본이 충분하지 않고 경험이 부족한 많은 SBIC가 곧바로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정부보조금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SBIC는 정부가 보증하는 자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1963년 9월 SBA는 Illinois SBIC를 자기거래, 리베이트, 자금 유용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규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SBIC 프로그램 자체의 정당성을 위협했다. 당시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이러한 사건들을 보도해 SBIC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부동산을 전문으로 하는 민간 SBIC는 자기거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BA는 1964년 부동산 투자와 담보 대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모든 SBIC에 대해 90일간 면허 정지를 하고 프로그램을 재정비했다. 90일 동안 조사관들은 각 SBIC를 방문해 조사를 했는데 10개의 SBIC 중 9개는 기관 규정을 위반했고 수십개의 회사는 중대한 범죄 행위를 했다. 대개의 경우 절차적 문제였지만 심각한 위반도 많이 발견됐는데, 이로 인해 의회로부터 SBIC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 압력이 증대됐다. 결국 SBA는 SBIC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SBIC에게는 프로그램 탈퇴를 권유했다. 또한 1966년에 의회는 SBIC 프로그램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했는데 정부가 투자한 총 2억 7천5백만 달러 중 약 1천8백만 달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이에 의회는 SBA에게 SBIC에 대한 이해 상충 의무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SBIC의 임원, 이사 및 대리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개정해 엄격한 처벌과 벌금을 부과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SBA는 SBIC가 혁신적인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의 지분을 주로 보유하도록 그 강조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규제 증가의 부작용으로서 SBIC 프로그램은 점점 더 관료적이고 제한적으로 됐다. 규제와 보고 요건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 있는 SBIC 운용자들이 프로그램을 떠나게 됐다. 아래의 [표 1]은 1960년대 초 SBIC 설립이 늘었다가 점차 그 수가 감소하고 1969년 이후에는 신규 진입자가 거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1967년 중소기업 및 벤처캐피탈 협회(이하 SBVCA)는 「중소기업을 위한 벤처캐피탈 장려」7)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SBVCA는 “SBIC 프로그램을 무능으로 얼룩진 형편 없는 프로그램”이라 공격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이 과도한 연방 규제에 있다고 결론짓고 프로그램 종료를 권고했다. 이 보고서로 인해 당시에 SBIC 프로그램에 그나마 남아 있던 벤처캐피탈들조차 대부분 SBIC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을 내렸다.

5) Venture Capital Journal, “SBICs after 25 Years: pioneers and builders of organized venture capital”, Venture Capital Journal, October, 6–12., 1983.
6) Hayes, S. L. and D. H. Woods, “Are the SBICs doing their job?”, Harvard Business Review, 6(15), 178–196., 1963.
7)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SBVCA), ‘Encouraging venture capital for small business,’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New York., 1967.

자료 : Wilmeth, J. (2002), ‘SBIC Program Statistical Package,’ U.S.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January.

SBIC 프로그램은 벤처캐피탈 산업에 몇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SBIC가 아니었으면 들어오지 않았을 많은 투자자가 벤처캐피탈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특히 일부 벤처캐피탈에게 많은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성공을 거두고, 이러한 성공적인 트랙 레코드를 발판으로 더 큰 기관 투자자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공급받는 등 벤처캐피탈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조직 형태의 벤처캐피탈 출현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50년대 말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합자조합) 형태8)의 벤처캐피탈이라는 또 다른 실험이 시작됐다. 1959년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패밀리 이외의 돈을 투자받기 위한 최초의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 벤처캐피탈인 Draper, Gaither, Anderson(이하 DGA)가 설립됐는데, DGA 설립자들은 국가의 정계와 경제계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ARD가 MIT와 하버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과 유사하게 DGA의 첫 사무실은 스탠퍼드대학교 캠퍼스에 설립했다. DGA의 초기 투자가 회수된 후 무한책임조합원(General Partner, 이하 GP)은 40%의 배당을 받을 수 있었고 유한책임조합원(Limited Partner, 이하 LP)은 나머지 60%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각 GP는 관리비로 연간 2만5천 달러를 받았으며 DGA 설정 기간은 기본적으로 5년이었다. 다만 LP 전원의 동의하에 일정 기간 연장할 수 있었다. DGA는 모든 수익을 배분했고 재투자는 없었으며, 재투자가 필요한 경우에 GP들은 또
다른 펀드를 설정해 자금을 모금했다. 이것은 그 당시 일반적인 패밀리 벤처캐피탈들이 수익을 보유하고 재투자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DGA는 5년의 존속기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리미티드 파트너십 펀드는 기본적으로 7년에서 10년의 존속 기간을 가졌으며, 새로운 리미티드 파트너십은 GP의 의지에 따라 설립될 수 있었다.

8) 벤처캐피탈 투자를 유한책임조합원(Limited Partner, 이하 LP)이 존재하는 Limited Partnership 형태로 만드는 아이디어의 출처는 불확실하지만 당시 세법을 가르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2번째로 Limited Partnership 형태로 설립한 Davis & Rock의 법률적 지원을 담당했던 Julian Stern은 석유 시추 산업에서 그 모델을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DGA의 세 명의 대표들은 이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수의 사모투자를 했던 전문가들이었는데 그들은 서부 지역 특히 캘리포니아에 투자한다는 명시적인 목적을 가지고 더 큰 투자금을 모집했다. 미국 서부 지역의 벤처캐피탈 활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서부 지역에는 중소기업에 체계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중요한 민간 투자 은행 그룹이 없기 때문에 서부 지역의 벤처캐피탈의 설립은 수많은 서부 지역의 중소기업과 상업은행들에 의해 환영과 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네트워크를 이용해 6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당시 투자자들은 부유한 엔젤투자가 Edward H. Heller (150만 달러), 투자은행인 Lazard Freres(150만 달러), Rockefeller Brothers, Inc.(120만 달러), 그리고 뉴욕의 한 투자 회사에서 파트너가 만든 개인법인인 Gadran Corporation(120만 달러)이었다. 나머지 60만 달러는 GP들이 투자했다. 1960년까지 DGA는 23개 회사에 투자했으며, 이중 12개 기업만이 기술 관련 기업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결국 1967년에 DGA는 청산됐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61년 아서 락(Arthur Rock)과 토마스 데이비스(Thomas Davis)에 의해 또 다른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인 Davis and Rock(이하 D&R)이 결성됐다. D&R의 350만 달러의 초기 자본은 ‘Teledyne’, ‘General Transistor’, ‘Fairchild’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들로부터 투자됐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전부터 Arthur Rock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D&R은 기술 회사에 초점을 맞추어 투자했고, 이중 컴퓨터 회사인 Scientific Data Systems에 투자한 257,000달러는 Xerox가 1969년에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D&R은 9,450만 달러(연평균 약 60%의 수익률)를 투자자들에게 배당한 후 1970년에 청산됐다. 이 연평균 수익률은 성공적인 벤처캐피탈 펀드가 얼마나 큰 수익을 배당할 수 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D&R의 성공은 ARD의 성공과 함께 잠재적인 벤처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다른 투자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벤처투자에 참여하도록 자극했다. 또한 D&R은 투자자와 함께 벤처캐피탈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 투자가 매우 우수한 조직 형태임을 입증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보스턴 지역 최초의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1965년 윌리엄 엘퍼스(William Elfers)가 ARD를 떠나 Greylock을 설립하고 동부 지역의 부유한 패밀리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으며 시작됐다. 서부 지역 최초로 결성된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인 Sutter Hill Ventures는 1964년 두 명의 전직 SBIC 운영자에 의해 설립됐다. 1965년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수백 개의 새로운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가 설립됐으며 펀드 규모도 점점 커졌다. 대부분의 리미티드파트너십은 부유한 개인들로부터 사모로 자금을 모집했는데 이 자금의 공급원은 제한적이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최초의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

초기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1,000만 달러 미만의 소규모로 운영됐으며, 일부 상장 및 은행 SBIC만이 2,000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운용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DEC, Itek, Scientific Data Systems와 같은 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벤처투자자가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벤처캐피탈 시장의 호황이 한창이던 1969년 Heizer Corporation와 New Court Private Equity Fund 2개 기관이 각각 8,100만 달러와 6,9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2개의 펀드는 이전의 어떤 벤처캐피탈 펀드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을 모집한 것으로 최초의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였다.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는 기존의 소규모 벤처캐피탈 펀드와는 달리 기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투자자들이 장기간의 고수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는 등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

대표적인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는 에드워드 하이저(Edward F. Heizer)가 설립한 시카고에 본사를둔 Heizer Corporation이었다. 하이저는 Allstate Insurance의 사모펀드를 운용하면서 벤처캐피탈산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펀드의 목적은 벤처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Allstate Insurance라는 보험 회사의 자금을 운용하는 기업 특성상 스타트업에 대한 위험 투자에 대한 내부의 저항 등과 같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이저가 성공시킨 ‘Memorex’, ‘Scientific Data Systems’, ‘Teledyne’에 대한 투자는 매우 뛰어난 수익률을 보였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 회사 Memorex에 대한 20만 달러 투자는 몇 년 후에 800만 달러의 가치가 됐다. 하이저는 Allstate 자본의 4%만 투자하면서도 Allstate Insurance 총이익의 50%에 달하는 수익을 창출했다. 하이저가 Allstate Insurance에서 7년 동안 집행한 투자는 연평균 수익률이 43%에 달했으며, 결국 벤처투자가 Allstate Insurance의 가장 큰 사업모델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벤처투자가 크게 성공하면서 Allstate Insurance 내부 직원과 벤처캐피탈 간의 성과급 배분의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하이저는 성과급 보상 문제가 Allstate Insurance 회사 조직 내에서는 해결될 수없는 문제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하이저는 5,000만 달러를 모집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뛰어난 투자 성과를 기록한 덕분에 8,100만 달러를 단기간에 모집했다.9) Heizer Corporation은 리미티드 파트너십의 형태가 아닌 BDC(Business Development Corporation) 형태로 조직됐는데 이것은 위험을 피하려는 기관 투자자들에게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조직의 형태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까지 하이저는 ‘Amdahl’, ‘Commodore Corporation’, ‘Data 100 Corporation’, ‘Fotomat’, ‘Material Sciences Corporation’, ‘Spectra Physics’ 등 32개 기업에 1억 2,100만 달러를 투자했다.10) 1980년대 초 Heizer Corporation은 공개 시장에 상장됐고 1986년에는 결국 여러 기업으로 분할됐다.

Heizer Corporation은 다양한 기업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라는 업적 이외에도 기관 투자자들이 벤처투자를 위해 많은 자본을 투자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Heizer Corporation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Business Development Corporation 형태의 벤처캐피탈은 향후 벤처캐피탈 시장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9) 12개의 보험회사(Allstate 제외), 6개의 상업은행, 2개의 투자은행, 그리고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Stanford University, State of Wisconsin Investment Board, University of California, University of Chicago, The University of Rochester endowments 등의 많은 기관 투자자가 Heizer에 투자를 했다.
10) 당시 다른 포트폴리오 회사로는 Beverly Enterprises, Federal Express, Nortec Electronics, a digital watch company, Precision Instrument, Southwest Airlines, Vilcor, Federal Express, Southwest Airlines 등이 있다.

또 다른 메가 펀드는 1969년 5,150만 달러를 모금한 뉴욕에 본부를 둔 유럽 로스차일드 계열의 New Court Private Equity Fund(NCPEF)였다. NCPEF의 주요 자금 공급원들은 IBM, AT&T, RCA와 같은 대기업들의 개인연금이었다. NCPEF는 Heizer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조직됐는데 그 이유는 투자자들이 그러한 형태에 더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NCPEF는 1974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으로 조직을 변경해 관리보수 2%, 성과보수 20%를 받았다. NCPEF는 Federal Express와 Amgen에 최초 투자를 했고, 이후 Cray Research와 Tandem Computers의 자금조달에도 참여했다. NCPEF의 성공은 1981년 로스차일드 일가가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고 NCPEF의 이름을 Rothschild, Inc로 바꾸고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중단됐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Charles Lea와 그의 동료인 John Birkelund는 NCPEF를 떠나 새로운 벤처캐피탈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을 결성했다.

Heizer Corporation과 NCPEF는 기존과 다르게 기관 투자자의 자금을 가지고 매우 높은 성공을 거두어 벤처투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기관 투자자들은 개인 투자자들과 달리 오랜 기간을 인내하며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벤처캐피탈 펀드는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주식 시장의 침체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Figure 1  Total venture capital invested and funds committed to limited partnerships

이 기간 동안 벤처캐피탈 업계와 투자자들에게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이 매력적인 조직 형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11)

11)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세법상 Limited Partnership은 조합과세를 받기 때문에 법인세가 없이 투자자에게 배당금이 온전히 지급됐으며, 만약 투자자들이 개인세금을 면제받으면 전혀 과세가 없었다. 둘째로, GP는 급여와 비용을 포함한 관리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과보수를 통해 시세차익을 LP와 공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큰 성공을 거둔 경우에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게 했다. 셋째로, Limited Partnership을 통해 벤처캐피탈들이 LP들로부터 관리수수료를 받는 것은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벤처캐피탈 회사에 별도의 배당이나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도록 했다. 넷째, LP는 GP의 결정에 간섭할 능력이 없어 펀드 운용에 있어 GP에게 많은 자율성이 부과됐다. 다섯째, Limited Partnership의 주요 LP인 기관투자자들은 장기 수익에 관심이 있었고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 벤처캐피탈에 대해 배당이나 이자 지급을 압박하지 않았다. 여섯째, 각각의 Limited Partnership은 7년에서 10년 사이의 제한된 수명을 가졌고 그 후 청산됐는데, 이러한 청산은 GP와 LP 모두에게 주기적인 변화를 촉진했다. 일곱 번째, 펀드는 단 한 번만 투자됐고 모든 수익금은 즉시 투자자들에게 분배됐다. 마지막으로, Limited Partnership의 라이프 사이클을 포트폴리오 기업의 라이프 사이클과 일치시킬 수 있었다.

벤처캐피탈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SBIC가 아닌 벤처캐피탈은 규제 활동, 정치 로비 등에 SBIC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벤처캐피탈들이 잘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4월, ‘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이하 NVCA)’라는 전국 벤처캐피탈을 대변할 수 있는 협회가 Heizer Corporation 사무실에서 출범했다. NVCA의 첫 번째 목표는 ERISA 제한을 완화해 벤처캐피탈 펀드의 자금 흐름을 늘리는 것이었다. 벤처캐피탈업계는 5년간 집중적인 로비를 통해 1978년 ERISA 법을 개정하도록 노동부를 설득해 전문적으로 운용되는 벤처캐피탈펀드에 대한 투자를 허용하게 했다.
ERISA 규정의 개정은 벤처캐피탈업계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연금펀드의 벤처투자 수치가 1978년 3,200만 달러에서 1984년 10억 8,500만 달러까지 급증했다. 이와 더불어 1978년 의회가 자본 이득 세율을 50%에서 28%로 낮춤으로써 1980년대 초 벤처캐피탈 시장이 급성장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됐다.

❻ 1980년대: 벤처캐피탈시장의 성숙화

1980년대 초는 놀라운 벤처투자 기업 IPO의 연속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벤처투자 중 하나는 1980년 10월에 공개돼 3,500만 달러를 모금한 Genentech이었는데, 이 회사의 주식은 개장일에 두 배로 증가했다. 또한 1980년 12월, Apple Computer는 주식을 상장해 일반에 팔았고 회사의 기업가치는 전례없는 17억 달러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후 1981년 3월, 또 다른 생명공학 회사인 Cetus는 상장돼 1억 7백만 달러를 모집했으며, 계속해서 3Com은 1984년에, Sun Microsystems와 Oracle은 1986년에 공개시장에 상장됐다. 벤처캐피탈 자금이 투자된 기업들의 주가 상승은 모두에게 그 수익성을 입증했는데, 이러한 IPO의 지속적 흐름과 초기 투자자에 대한 막대한 수익은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였으며 성공적인 벤처캐피탈들과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들이 획득한 자본 이득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하지만 이 기간의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 수익은 일부의 것이다. 실리콘밸리 기업가 정신을 다룬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1974년 첫 펀드에서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와 토마스 퍼킨스(Thomas Perkins)는 800만 달러를 모금해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연평균 39%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두 명의 새로운 파트너를 추가한 두 번째 펀드는 1978년에 1,500만 달러를 모금했고 처음 5년 동안 연평균 83%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또한 1980년에 모금된 5,500만 달러의 세 번째 펀드는 처음 8년 동안 연평균 65%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다른 벤처캐피탈 펀드들도 매우 높은 연간 수익률을 달성했으며, 이러한 수익으로 더욱더 많은 자본과 능력 있는 개인들이 벤처캐피탈 시장에 몰려들게 됐다. 1980년대 이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모델은 벤처캐피탈 투자를 조직하는 지배적인 모델이 됐다. 실제로 1984년에 총 163억 달러가 조성된 벤처캐피탈 자금의 72%가 독립된 벤처캐피탈 기업들에 의해 관리됐으며, 이중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였다.12)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이 시기에는 벤처캐피탈 자체가 대중 매체에서 큰 이슈로 떠올랐다. 1981년 3월 9일 Genentech의 창업자인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 교수가 주간지 타임의 표지에 실렸으며, 1982년 2월 15일에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그 뒤를 따랐다. 표지와 함께 이 기업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벤처캐피탈을 눈부신 찬사로 수식한 특집 기사들이 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벤처캐피탈 시장에서 가장 이슈는 1984년 1월 23일 Fairchild와 Intel 금융을 주선했던 벤처투자가 아서 록(Arthur Rock)이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을 때였다. 벤처캐피탈은 현재에도 미국 내에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단어가 됐다.

12) Venture Economics, Inc., “The Venture Capital Industry: Opportunities and Considerations for Investors. Wellesley Hills”, MA., 1985.

 Table 3  Venture capital investment; various years and various states by percentage and totala

자료 : Florida, R., D. F. Smith and E. Sechoka (1991), ‘Regional patterns of venture capital investment,’ in M. B. Green (ed.), Venture capital: International Comparisons. Routledge: London, UK.

벤처캐피탈의 발전으로 인해 전자, 통신 및 바이오메디컬 분야에서 미국 혁신의 지리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1960~70년대 가장 권위 있는 산업 연구소는 동부 해안과 산업 중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실리콘밸리로 점차 이동했고 당시 미국 벤처투자액의 30%를 실리콘밸리가 차지하게 됐다. 미니애폴리스의 ‘Norwest Venture Partners of Minneapolis’, ‘Morgenthaler Ventures of Cleveland’의 ‘Morgenthaler Venture’와 같은 다른 상위 벤처캐피탈 회사들은 1980년대에는 실리콘밸리에 지점을 개설하고 1990년대에 벤처투자 사업체를 실리콘밸리로 이전했다. 이후 연이어 벤처투자가 성공하면서 기업가들과 벤처투자가들 사이의 투자 계약은 점점 더 표준화됐고, 양 당사자에 대한 제약의 구속력은 약화됐다. 이것은 기업가와 벤처투자가들이 지역 변호사들의 매개체를 통해 좀더 유연한 계약을 하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과 벤처캐피탈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혁신 시스템이 제도화됐다.

❼ CVC 등장 및 성장

벤처캐피탈의 발전으로 인해 전자, 통신 및 바이오메디컬 분야에서 미국 혁신의 지리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1960~70년대 가장 권위 있는 산업 연구소는 동부 해안과 산업 중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실리콘밸리로 점차 이동했고 당시 미국 벤처투자액의 30%를 실리콘밸리가 차지하게 됐다. 미니애폴리스의 ‘Norwest Venture Partners of Minneapolis’, ‘Morgenthaler Ventures of Cleveland’의 ‘Morgenthaler Venture’와 같은 다른 상위 벤처캐피탈 회사들은 1980년대에는 실리콘밸리에 지점을 개설하고 1990년대에 벤처투자 사업체를 실리콘밸리로 이전했다. 이후 연이어 벤처투자가 성공하면서 기업가들과 벤처투자가들 사이의 투자 계약은 점점 더 표준화됐고, 양 당사자에 대한 제약의 구속력은 약화됐다. 이것은 기업가와 벤처투자가들이 지역 변호사들의 매개체를 통해 좀더 유연한 계약을 하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과 벤처캐피탈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혁신 시스템이 제도화됐다.

 그림 1  CVC 투자 규모

자료 : PitchBook(2019)

13) Jennifer S. Fan, “Catching disruption: Regulating Corporate venture capital”, Columbia Law Review, vol. 2018.

네 번째 단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금융위기 이후 CVC 산업은 전통적인 벤처캐피탈 투자보다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1,200개 이상의 기업이 CVC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절반 이상이 2010년 이후 설립됐다. 또한 2012년~2016년에 CVC의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20년 동안 미국에 기반을 둔 CVC의 투자는 17배나 증가했다. 또한 2018년 미국 총 벤처캐피탈투자(Deal)가 1,310억 달러인데, 이중 CVC 투자는 696억 달러로 CVC 투자가 총 벤처캐피탈 투자 중 53%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14)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최신 혁신을 따라잡기 위해 CVC 설립을 선택하고 있다. CVC 설립의 가장 큰 장점은 모기업의 전문 지식, 네트워크를 활용해 신사업의 규모를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CVC는 순수하게 재무적 이익에 초점을 맞춘 벤처캐피탈기업과는 다르게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림 2  투자 단계별 CVC 투자 횟수

1980년대 초창기 CVC는 창업 후기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또한 이사진을 선임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CVC를 통해 창업 초기 단계에 투자를 하며 이사진을 선임해 모든 창업 단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15) CVC는 더 이상 실험이 아닌 새로운 벤처캐피탈 투자 방식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14) PitchBook, “2019 YearBook”, 2019, p.31.
15) Sesame Street, Walgreens, 7-Eleven, General Motors, and Campbell Soup 등과 같은 회사는 최근 미국 CVC의 시장에서 Google과 Intel과 같은 10대 기업들에 합류했다.

02

미국 벤처캐피탈의 역사

❶ 벤처캐피탈 출현 전 모험 자금(1880년~1929년)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기술 혁신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880년부터 1900년까지 과학 기술기반 회사들이 기업 내부에 R&D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들은 기업에 필요한 새로운 제품과 생산 공정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 당시 미국 내에서는 기업연구소 설립뿐만 아니라 창업자(발명가)에 의한 발명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은행이 점점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으로 변모하면서 창업자에게 자금이 원활히 공급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창업자는 공식적인 은행보다는 가족, 친구, 성공한 기업인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으며 발명을 계속했다. 실제로 미국 중서부 지역, 특히 디트로이트에서 초기의 자동차 산업에 자금을 지원한 주체는 은행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성공한 기업인이었으며, 금융회사들은 초기 단계의 자동차 창업자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것을 주저했다.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고 통합되는 동안 또 다른 산업인 항공 산업이 출현했는데, 항공 산업이야말로 벤처캐피탈 산업의 탄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항공업 창업자는 자동차에 사용된 부품에서 비행기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으나 점차 비행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정교한 제품으로 진화했다. 그 후 항공업이 항공우주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정부는 군용 항공 산업에서 정교한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들의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수십 년 동안 항공 분야에는 주로 부유한 개인이 투자했다. 이들은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항공업을 유망한 투자 분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비행으로 유명한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는 카보츠(Cabots),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어거스트 버몬트(August Belmont), 러셀(Russell), 프레드릭 알제(Frederick Alger)와 같은 동부의 기업인들과 금융가들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항공 분야의 창업자들은 자비로 사업을 시작했다. 비행에 열망을 품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것을 계기로 지속적인 기술의 변화에 따른 성장 가능성을 믿고 기존에 다니던 항공 회사를 퇴사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당시 항공 분야에서는 현대적인 벤처캐피탈과 유사한 기관들의 투자 실험이 있었는데 1926년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은 250만 달러의 펀드로 항공 분야의 과학 기술 연구를 장려해 민간 항공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었다. 1927년 이 펀드는 미국 최초의 항공사인 웨스턴 항공사에 15만 달러를 대출(Loan)해주었는데 항공사의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1년 안에 모두 상환됐다. 이 펀드는 계속해서 항공 산업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투자됐고, 어떤 측면에서 최초의 벤처캐피탈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3) 미국 벤처캐피탈의 역사 부분은 “Martin Kenney, ‘How venture capital became a component of the US National System of Innovation’, 2011.”의 내용을 요약 및 정리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로 꼽히는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Ⅰ)의 손자인 로렌스 록펠러(Laurance S. Rockefeller)는 벤처캐피탈과 같은 투자에 관심이 컸다. 그의 첫 투자는 1938년 에디 리켄베커(Edie Rickenbacker)가 설립한 Eastern Airlines사에 대한 차환(Refinancing)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 후 1938년 로렌스 록펠러는 Glenn L. Martin Aircraft 회사의 디자이너였던 J. S. 맥도넬(J. S. McDonnell)에 투자해 세인트루이스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기 직전인 1940년 로렌스는 그의 아버지에게 신탁기금에서 석유 주식의 일부를 매각할수 있도록 요청해 지속적으로 다양한 항공 산업 회사에 투자할 수 있었다. 특히 군대에 비행기를 공급
하는 군 항공 산업 관련 회사에 투자해 큰 수익을 올렸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항공 산업은 놀라운 성장을 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대형 항공업체들은 물론 Hewlett Packard, Raytheon 등 그 당시 소규모 전자 업체들도 덩달아 큰 수익을 냈다. 당시 군 항공기의 속도와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 항공기에 더 정교한 기술을 요구했으며 기술이 향상된 항공기는 매우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이 시기 특수한 부품을 만들 수 있는 정교한 기술력을 가진 소규모 기업체들의 제품들이 연방 정부로부터 매우 높은 가격으로 구매돼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으며 특히 전자제품이 관련된 항공 및 항공 관련 산업은 초기 모험 자본의 주요한 투자 분야가 됐다.

❷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시작으로 미국 금융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재편됐다. 1930년대 대공황 관련 의회 청문회에서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 IPO와 관련해 고의로 대중에게 정보를 숨겼다는 사실을 포함해 많은 문제점이 발견됐는데, 이에 따라 의회는 1933년 글래스-스티걸법(The Glass–Steagall Banking Act)을 제정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류함으로써 상업은행 업무를 모험자본시장으로부터 분리했다. 또한 1934년 의회는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이하 SEC)를 창설해 주식 시장 조작 및 내부자 거래 등을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SEC에 부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주요한 채널을 중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경제 정책의 건강한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결과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이 문제는 당시 정치적·이념적 문제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옹호하는 정치인은 정치적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소기업 자금 지원 공약을 제시했지만 연방정부의 경제 개입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의 반대에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이러한 논쟁은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지만 아직까지 벤처캐피탈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MIT 총장 칼 콤프톤(Karl Compton)과 Raytheon를 설립한 MIT 엔지니어인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등 엘리트 학자들은 신기술을 상용화하는 중소기업이 뉴잉글랜드 지역과 미국 경제 회복의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MIT에서 개발되고 있는 신기술들을 상용화하도록 새로운 스타트업들을 장려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36년 미국 경제가 대공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주식 시장과 경제가 다시 한 번 급락하면서 정부와 학계에서는 중소기업에 어떻게 자금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1938년 조셉 니콜슨(Joseph Nicholson)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서 기존의 금융기관 및 정부기관도 중소기업 금융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없으며 새로운 자금 공급 방안이 필요함을 주장했고, 1939년 보스턴의 링컨 필린(Lincoln Filene)은 은행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정부 보조금의 대가로 은행과 기업이 출자한 민간 자금을 활용해 지역 산업개발신탁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같은해 로건부히스(Logan Voorhis)는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예금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중간 신용은행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더 나아가 1939년 후반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소기업에 대한 장기 대출에 대해 원금의 80%까지 연방보험으로 지원하는 방안과 함께 중소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를 하고 그들에게 은행 대출을 보증하기 위한 ‘연방산업대출회사(Federal Industrial Loan Corporation)’를 설립하려고 했다. 이렇듯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이어졌다.

당시 정부와 학계뿐만 아니라 투자은행들도 중소기업에 새로운 자금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중소기업들의 성장 잠재력이 제한적이고 전체 수수료가 적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1938년 실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상원위원회에서 E. I. Nemours du Pont Corporation의 회장인 라못 뒤 퐁(Lammot du Pont)은 “미국이 다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이라고 보고했다. 이 위원회에서 벤처캐피탈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다. 1938년 1월 1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에서 라못 뒤 퐁의 벤처캐피탈이라는 문구를 채택해 벤처캐피탈을 “수익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지 않은 투자”로 정의했다.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은 1938년 1월 24일자 사설에서 “미국 경제에서 벤처캐피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관은 없는데 그 이유는 벤처 정신을 가지고 돈을 빌려줄(borrow) 수 있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논평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사설은 “빌려주는(borrow)”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벤처캐피탈에 대한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벤처캐피탈’이라는 용어가 금융권에 매력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1939년 10월 9일 샌프란시스코 증권회사인 Dean Witter & Company의 장 위터(Jean Witter) 회장은 투자은행협회 연설에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새로운 기업 창출과 확장을 촉진할 새로운 형태의 자본인 벤처캐피탈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 이득에 대한 큰 폭의 세금 감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 위터(Jean Witter) 회장은 벤처캐피탈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실험 단계에 있는 사업을 위해 공모로 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초기 사업에 대한 자금 조달은 위험에 익숙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며 새로운 사업의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누가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새로운 기관을 어떻게 만들고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지만, 특별히 벤처캐피탈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다가오는 실업 문제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벤처캐피탈의 중요성을 강조한 ‘Massachusetts Prepares for Tomorrow’라는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면서 다시 한 번 벤처캐피탈이 중소기업의 자금 공급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의가 진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의 10년간의 논쟁 후에도 중소기업 자금 지원에 대한 논의는 적절한 방안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만 계속되었다.

❸ 벤처캐피탈 회사의 출현(1946년 ~ 1950년대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하며 기술적으로 강한 국가로 만들었다. 레이더와 원자폭탄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와 이익에 대한 믿음이 치솟았다. 1945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당시 카네기재단 이사장인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에게 새로운 기업과 산업의 형성을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과학 기술 지식이 어떻게 전후(戰後)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네바 부시는 그의 보고서인 <끝없는 개척자(The Endless Frontier)>에서 전후 경제의 핵심은 지속적인 과학 기술에 대한 연구에 달려있다고 기술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과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규모 기술 기반 중소기업에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가 있다는 믿음을 표명했다. 과학적 연구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부시의 보고서는 보스턴 지역의 학계 및 사업가에게 대학에서 새로운 연구를 사업화해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지역 경제 회복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빠르게 발전한 기술들이 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일례로 1938년 설립된 신생 회사였던 Hewlett Packard는 1941년 10만 6,458달러의 매출을 달성했고, 1945년에는 연간 매출액이 100만 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기술 기반 창업의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고위험 기업에 투자하거나 기존 기업의 확장에 자본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몇몇 선구적인 벤처캐피탈 회사가 출현했다. 보스턴에서는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칼 콤프톤(Karl Compton), 랄프 플랜더스(Ralph Flanders)와 하버드 경영대학원 조지 도리오(Georges Doriot) 원장 등 기업 및 대학 지도자들이 American Research and Development(이하 ARD)라는 최초의 벤처캐피탈을 결성했다. ARD는 투자신탁 및 보험회사 등의 기관 투자자, 그리고 초기 공모주 발행을 통해 주로 자금을 조달했다. 자금을 모집한 이후 ARD는 중소기업에 자금을 직접 투자하기 시작했고, 투자 대상 기업 중 다수는 MIT에서 스핀오프해서 나온 기업들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로렌스 록펠러(Laurance Rockkefeller), 존 휘트니(John H. Whitney), 그리고 휘트니(Whitney)의 여동생 조안 휘트니 페이슨(Joan Whitney Payson)은 뉴욕에 각각 세 개의 패밀리(Family) 펀드를 설립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이들 벤처캐피탈 개척자들은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경영 자문을 하는 등의 지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기존의 모험 자본은 대부분 자선적인 차원에서 큰 손실을 동반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로부터 수익을 낼 수 있는 상업적인 조직으로 만들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다.4) 세 개의 패밀리 벤처캐피탈은 조합(Partnerships)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가족들의 자본으로만 이루어졌고, ARD는 주로 공모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했다. ARD의 초기 투자자들 중에는 기관투자자인 투자신탁, 대학기금, 보험 회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훨씬 후에 사모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에 LP 투자자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됐다. 1947년 Rockkefeller 벤처캐피탈은 항공, 주택, 전자 분야에 투자를 했으며, 방사성 동위원소, 멕시코 산업, 목재나 플라스틱을 사용한 새로운 공정, 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투자했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들 4개 벤처캐피탈들은 간헐적으로 다른 투자자가 참여해 벤처투자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그 당시 다른 투자자들은 거의 이 시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3개의 패밀리 벤처캐피탈이 그들의 수익을 공개하지 않았고, ARD는 단지 몇 번 작게 성공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4) 벤처캐피탈은 어떻게 자본을 조달해야 하는가? 투자 수익을 기다리는 동안 일상적인 운영 지원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투자 대상 및 투자 분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술, 소매, 제조, 부동산 등이 위험에 상응하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 벤처캐피탈 기업을 위한 최상의 조직 구조, 벤처캐피탈 전문가를 위한 최상의 보상 방법, 포트폴리오 회사와의 상호작용을 관리하는 방법 및 개별 벤처캐피탈 투자자에게 보상하는 방법 등 많은 운영상의 고민이 있었다.

❹ 벤처캐피탈산업의 출현(1950년대 후반 ~ 1970년대)

195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벤처캐피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 1957년 10월 우주 개발 경주에 불을 붙인 스푸트닉(Sputnik; ‘동반자’라는 뜻의 러시아어, 구소련(USSR)이 초창기에 개발한 인공위성) 발사가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에 트랜지스터, 컴퓨터, 그리고 다양한 과학기구와 같은 경량 부품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발생시켰다. 이에 따라 1958년 미국 국방부는 국방 관련 연구, 특히 항공우주, 전기공학, 컴퓨터 과학 분야의 막대한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진국방연구사업청(The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dministration, 이하 DARPA)을 설립했다. 미 국방부는 기존에도 대학과 기업에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DARPA는 기존과는 다른 규모로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스푸트닉 발사로 인해 생겨난 미 국방부의 투자는 두 가지 면에서 벤처캐피탈 산업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투자로 인해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첨단 전자제품의 시장이 크게 성장해 관련 중소기업의 이익이 대규모로 늘었으며, 둘째, 대학 전기공학부에 대한 연구비가 대폭 증가해 1960년대에 많은 대학에서 독립형 컴퓨터공학과가 설립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컴퓨터공학과의 학생들이 새로운 발명과 기술을 만들어 냈고 이들이 졸업하자마자 연구자, 기술 중심의 스타트업 임원 및 기업 창업자로 성장하게 됐다. 이로 인해 컴퓨터 부품 및 소프트웨어 기술이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발견은 실리콘 기반 반도체가 약 2년마다 처리 능력 가격 대비 2배의 성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발견이었다(Gordon Moore’s Law). 이것은 성능이 뛰어나지만 저렴한 컴퓨터의 생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발전이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모듈화의 증가도 새로운 부품 회사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고, 시스템 수준에서는 기업가들이 기존의 부품으로 새 컴퓨터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55년 로스앤젤레스 기반 회사인 Beckman Instruments 설립자인 아놀드 벡맨(Arnold Beckman)이 팔로알토(Palo Alto)에 있는 스타트업 Shockley 반도체에 투자한 것은 실리콘밸리의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후 Shockley와 엔지니어들 간의 불화로 인해 엔지니어 중 8명은 Fairchild 반도체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들은 IBM의 셔먼 페어차일드(Sherman Fairchild)로부터 3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Fairchild 반도체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어 급성장하였으며, 실리콘밸리 지역의 많은 잠재적 창업자들에게 창업 성공의 열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Fairchild 출신의 기술가들은 이후 계속해서 회사들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벤처캐피탈사들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은 기업가들과 투자자들 모두에게 상당한 자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Fairchild는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당시 서부 지역의 관행과는 다르게 직원들에게 스톡옵션(Stock Option)을 부여한 것이다. 스톡옵션은 종업원들의 이익을 기업가들과 벤처투자자들의 이익과 균등하게 배분하는 데 기여했으며 최고의 엔지니어들과 임원들이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신생 창업 기업의 스톡옵션은 벤처캐피탈에 의해 추진되는 새로운 경제 사업 모델의 핵심 부분이 됐다.
이후 벤처투자는 눈부신 투자 수익을 올렸는데, 첫 번째 성공은 1958년 위성사진 촬영용 정보 처리 시스템을 제작한 Itek 회사에 대한 Rockefeller Brothers, Inc(이하 RBI)의 투자였다. 1958년 RBI는 Itek 주식을 주당 2달러에 매수해 1961년 5월까지 장외시장에서 주당 60달러에 매도했다. 1957년 ARD는 MIT 링컨 연구소의 자회사인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이하 DEC)의 지분 70%를 대가로 7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1966년에 DEC가 IPO를 할 당시 ARD의 DEC 지분 가치는 3850만 달러(연평균 100% 수익률)로 향상했다. 곧 파산한 Itek과는 다르게 DEC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1970년에는 기업가치가 3억 5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DEC는 벤처캐피탈이 향후 미국 경제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존 학자들의 주장을 입증했다.

초기 벤처캐피탈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국방연구개발기금(Defense R&D Funding)이라고 볼 수 있다. 국방연구개발기금은 특히 기술 기반 창업 기업의 성장을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형성된 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국방부는 혁신적인 기술 제품의 구매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컴퓨터 기술 혁신을 위한 민간 벤처캐피탈의 역할이 증가됐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반도체 시장에서 국방부의 구매율이 전체 시장의 20%에서 30% 사이였으나 1978년에는 13%로 떨어졌고 점차 민간 벤처투자로 대체됐다. 또한 1960년대에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은 대규모 비용이 들어가는 계약을 종결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방위산업 시장은 신생 기업과 벤처투자자들에게 매력을 잃게 됐다.

SBIC(The Small Business Investment Corporations)

중소기업을 지원하려는 정부와 의회의 의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됐다. 1953년 의회와 행 정부를 장악한 공화당은 대공황 시대의 재건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 폐쇄에 대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중소기업부(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이하 SBA)를 신설했다. 미국 경제가 불경기로 빠져들고 중간선거가 다가오면서 공화당 의원들은 선거 결과를 걱정 했고 1958년 초 상원 다수당 지도자인 린든 존슨(Lyndon Johnson) 의원이 중소기업의 자금 대출 요구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SBIC’를 설립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SBIC는 중소기업에 직접 연방 자금의 대출을 제공하는 대신 민간 투자자인 SBIC에게 대출을 보증하는 형태로 설계됐으며 정부는 SBIC에 인센티브와 감독을 제공했지만 자금 지원을 받을 중소기업에 대한 어떠한 결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SBIC 지원자는 면허를 받기 위해서 최소한 15만 달러의 납입 자본금을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연 5%의 이자율로 15년 대출과 20년 후순위 채권의 형태로 최대 200%의 레버리지(Leverage)를 받을 수 있었다. SBIC의 자본이 15만 달러 이상일 경우에는 레버리지가 점차 감소하게 되어 작은 규모의 벤처캐피탈들이 SBIC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초기 SBIC 법률은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SBIC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요구했지만 이는 중소기업이 받은 자금을 투자자에게 환급하게 되는 꼴이라 곧 철회됐다. 투자자들로부터 포트폴리오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SBIC가 포트폴리오 기업의 20% 이상을 소유하는것 또한 금지됐는데 이는 SBIC가 투자한 기업에 영향을 행사하는데 한계가 됐다. 즉 SBIC는 이 규정으로 인해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추가 자금을 요구하는 경우 후속 투자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SBIC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했다. 먼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SBIC가 있었는데 이들이 선택한 투자 분야는 부동산과 소매점부터 기술 회사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SBIC 중에는 최소 자본 금액을 기초로 설립된 곳도 있었다. 둘째, 주식 공모를 통해 그들의 자본을 조달하는 형태의 SBIC가 있었다. 이러한 SBIC는 수는 적지만 전체 SBIC 자본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마지막 유형으로는 금융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SBIC로, 이는 상업은행들이 글래스-스티걸법(The Glass–Steagall Banking Act)상의 투자 금지를 우회해 투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초반에는 많은 벤처투자자가 SBIC 프로그램의 개시를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곧 여러 가지 문제점이 부각됐다. 가장 큰 문제는 45만 달러의 자본금(최소자본금 15만 달러+2배의 레버리지)밖에 모집할 수 없어 중소기업에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당시 가장 작은 SBIC의 경우 정규직 직원을 단 한 명도 고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게다가 SBIC의 한정된 자본은 포트폴리오 회사에 대한 후속 투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SBIC의 레버리지는 매력적으로 인식됐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기술 기반 중소기업들의 성공으로 인해 많은 SBIC가 설립됐다. SBIC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면서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전자제품에 투자한 SBIC의 빠른 성공으로 인해 단시간에 벤처캐피탈산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였다. 벤처캐피탈저널이 수집한 자료5)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63년까지 SBIC는 민간 벤처캐피탈보다 3배 많은 자금을 중소기업에 공급 했다고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 투자 격차는 상당히 줄었으며 SBIC가 대중에게 주식을 발행 하고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를 상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활발한 주식 시장상황은 지속되지 않았다.

1962년 주식 시장의 하락으로 일부 상장 SBIC의 주가는 장부 가격의 50% 이하로 폭락했으며 SBIC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 Hayes and Woods의 보고서6)에 따르면 SBIC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은 제조업 투자 지원이었지만, 주식 시장의 어려움으로 인해 가장 인기 있는 투자 분야는 1위 부동산, 2위 소매점, 3위 전자제품, 4위 컨설팅, 5위 개인 서비스 순이었다. 결정적으로 SBIC가 실패했던 이유는 부동산과 소매점의 투자조차 실패율이 높았다는 점이었다. 주식 시장의 하락은 상장 SBIC가 자발적인 청산으로 SBIC 프로그램을 종료하게 했고, 1972년까지 50개의 상장 SBIC 중 36개가 청산, 합병 또는 전환됐다. 그리고 1980년대에 해당 SBIC의 대부분이 시장을 떠났다.

은행이 설립한 SBIC도 전문적으로 운영되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은행은 SBIC를 관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중소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인력 및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은행의 지원을 받는 SBIC를 통한 조사에서 응답자(전체 SBIC의 15%)의 27%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알았다면 SBIC를 결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답할 만큼 상당한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던 곳은 소규모로 결성된 SBIC였다. 기본적으로 자본이 충분하지 않고 경험이 부족한 많은 SBIC가 곧바로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정부보조금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SBIC는 정부가 보증하는 자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1963년 9월 SBA는 Illinois SBIC를 자기거래, 리베이트, 자금 유용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규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SBIC 프로그램 자체의 정당성을 위협했다. 당시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이러한 사건들을 보도해 SBIC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부동산을 전문으로 하는 민간 SBIC는 자기거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BA는 1964년 부동산 투자와 담보 대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모든 SBIC에 대해 90일간 면허 정지를 하고 프로그램을 재정비했다. 90일 동안 조사관들은 각 SBIC를 방문해 조사를 했는데 10개의 SBIC 중 9개는 기관 규정을 위반했고 수십개의 회사는 중대한 범죄 행위를 했다. 대개의 경우 절차적 문제였지만 심각한 위반도 많이 발견됐는데, 이로 인해 의회로부터 SBIC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 압력이 증대됐다. 결국 SBA는 SBIC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SBIC에게는 프로그램 탈퇴를 권유했다. 또한 1966년에 의회는 SBIC 프로그램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했는데 정부가 투자한 총 2억 7천5백만 달러 중 약 1천8백만 달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이에 의회는 SBA에게 SBIC에 대한 이해 상충 의무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SBIC의 임원, 이사 및 대리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개정해 엄격한 처벌과 벌금을 부과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SBA는 SBIC가 혁신적인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의 지분을 주로 보유하도록 그 강조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규제 증가의 부작용으로서 SBIC 프로그램은 점점 더 관료적이고 제한적으로 됐다. 규제와 보고 요건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 있는 SBIC 운용자들이 프로그램을 떠나게 됐다. 아래의 [표 1]은 1960년대 초 SBIC 설립이 늘었다가 점차 그 수가 감소하고 1969년 이후에는 신규 진입자가 거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1967년 중소기업 및 벤처캐피탈 협회(이하 SBVCA)는 「중소기업을 위한 벤처캐피탈 장려」7)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SBVCA는 “SBIC 프로그램을 무능으로 얼룩진 형편 없는 프로그램”이라 공격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이 과도한 연방 규제에 있다고 결론짓고 프로그램 종료를 권고했다. 이 보고서로 인해 당시에 SBIC 프로그램에 그나마 남아 있던 벤처캐피탈들조차 대부분 SBIC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을 내렸다.

5) Venture Capital Journal, “SBICs after 25 Years: pioneers and builders of organized venture capital”, Venture Capital Journal, October, 6–12., 1983.
6) Hayes, S. L. and D. H. Woods, “Are the SBICs doing their job?”, Harvard Business Review, 6(15), 178–196., 1963.
7)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SBVCA), ‘Encouraging venture capital for small business,’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New York., 1967.

자료 : Wilmeth, J. (2002), ‘SBIC Program Statistical Package,’ U.S.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January.

SBIC 프로그램은 벤처캐피탈 산업에 몇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SBIC가 아니었으면 들어오지 않았을 많은 투자자가 벤처캐피탈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특히 일부 벤처캐피탈에게 많은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성공을 거두고, 이러한 성공적인 트랙 레코드를 발판으로 더 큰 기관 투자자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공급받는 등 벤처캐피탈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조직 형태의 벤처캐피탈 출현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50년대 말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합자조합) 형태8)의 벤처캐피탈이라는 또 다른 실험이 시작됐다. 1959년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패밀리 이외의 돈을 투자받기 위한 최초의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 벤처캐피탈인 Draper, Gaither, Anderson(이하 DGA)가 설립됐는데, DGA 설립자들은 국가의 정계와 경제계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ARD가 MIT와 하버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과 유사하게 DGA의 첫 사무실은 스탠퍼드대학교 캠퍼스에 설립했다. DGA의 초기 투자가 회수된 후 무한책임조합원(General Partner, 이하 GP)은 40%의 배당을 받을 수 있었고 유한책임조합원(Limited Partner, 이하 LP)은 나머지 60%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각 GP는 관리비로 연간 2만5천 달러를 받았으며 DGA 설정 기간은 기본적으로 5년이었다. 다만 LP 전원의 동의하에 일정 기간 연장할 수 있었다. DGA는 모든 수익을 배분했고 재투자는 없었으며, 재투자가 필요한 경우에 GP들은 또
다른 펀드를 설정해 자금을 모금했다. 이것은 그 당시 일반적인 패밀리 벤처캐피탈들이 수익을 보유하고 재투자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DGA는 5년의 존속기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리미티드 파트너십 펀드는 기본적으로 7년에서 10년의 존속 기간을 가졌으며, 새로운 리미티드 파트너십은 GP의 의지에 따라 설립될 수 있었다.

8) 벤처캐피탈 투자를 유한책임조합원(Limited Partner, 이하 LP)이 존재하는 Limited Partnership 형태로 만드는 아이디어의 출처는 불확실하지만 당시 세법을 가르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2번째로 Limited Partnership 형태로 설립한 Davis & Rock의 법률적 지원을 담당했던 Julian Stern은 석유 시추 산업에서 그 모델을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DGA의 세 명의 대표들은 이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수의 사모투자를 했던 전문가들이었는데 그들은 서부 지역 특히 캘리포니아에 투자한다는 명시적인 목적을 가지고 더 큰 투자금을 모집했다. 미국 서부 지역의 벤처캐피탈 활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서부 지역에는 중소기업에 체계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중요한 민간 투자 은행 그룹이 없기 때문에 서부 지역의 벤처캐피탈의 설립은 수많은 서부 지역의 중소기업과 상업은행들에 의해 환영과 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네트워크를 이용해 6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당시 투자자들은 부유한 엔젤투자가 Edward H. Heller (150만 달러), 투자은행인 Lazard Freres(150만 달러), Rockefeller Brothers, Inc.(120만 달러), 그리고 뉴욕의 한 투자 회사에서 파트너가 만든 개인법인인 Gadran Corporation(120만 달러)이었다. 나머지 60만 달러는 GP들이 투자했다. 1960년까지 DGA는 23개 회사에 투자했으며, 이중 12개 기업만이 기술 관련 기업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결국 1967년에 DGA는 청산됐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1961년 아서 락(Arthur Rock)과 토마스 데이비스(Thomas Davis)에 의해 또 다른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인 Davis and Rock(이하 D&R)이 결성됐다. D&R의 350만 달러의 초기 자본은 ‘Teledyne’, ‘General Transistor’, ‘Fairchild’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들로부터 투자됐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전부터 Arthur Rock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D&R은 기술 회사에 초점을 맞추어 투자했고, 이중 컴퓨터 회사인 Scientific Data Systems에 투자한 257,000달러는 Xerox가 1969년에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D&R은 9,450만 달러(연평균 약 60%의 수익률)를 투자자들에게 배당한 후 1970년에 청산됐다. 이 연평균 수익률은 성공적인 벤처캐피탈 펀드가 얼마나 큰 수익을 배당할 수 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D&R의 성공은 ARD의 성공과 함께 잠재적인 벤처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다른 투자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벤처투자에 참여하도록 자극했다. 또한 D&R은 투자자와 함께 벤처캐피탈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 투자가 매우 우수한 조직 형태임을 입증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보스턴 지역 최초의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1965년 윌리엄 엘퍼스(William Elfers)가 ARD를 떠나 Greylock을 설립하고 동부 지역의 부유한 패밀리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으며 시작됐다. 서부 지역 최초로 결성된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 펀드인 Sutter Hill Ventures는 1964년 두 명의 전직 SBIC 운영자에 의해 설립됐다. 1965년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수백 개의 새로운 리미티드 파트너십 형태의 벤처캐피탈가 설립됐으며 펀드 규모도 점점 커졌다. 대부분의 리미티드파트너십은 부유한 개인들로부터 사모로 자금을 모집했는데 이 자금의 공급원은 제한적이었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최초의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

초기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1,000만 달러 미만의 소규모로 운영됐으며, 일부 상장 및 은행 SBIC만이 2,000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운용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DEC, Itek, Scientific Data Systems와 같은 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벤처투자자가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벤처캐피탈 시장의 호황이 한창이던 1969년 Heizer Corporation와 New Court Private Equity Fund 2개 기관이 각각 8,100만 달러와 6,9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2개의 펀드는 이전의 어떤 벤처캐피탈 펀드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을 모집한 것으로 최초의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였다.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는 기존의 소규모 벤처캐피탈 펀드와는 달리 기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투자자들이 장기간의 고수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는 등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

대표적인 대규모 벤처캐피탈 펀드는 에드워드 하이저(Edward F. Heizer)가 설립한 시카고에 본사를둔 Heizer Corporation이었다. 하이저는 Allstate Insurance의 사모펀드를 운용하면서 벤처캐피탈산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펀드의 목적은 벤처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Allstate Insurance라는 보험 회사의 자금을 운용하는 기업 특성상 스타트업에 대한 위험 투자에 대한 내부의 저항 등과 같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이저가 성공시킨 ‘Memorex’, ‘Scientific Data Systems’, ‘Teledyne’에 대한 투자는 매우 뛰어난 수익률을 보였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 회사 Memorex에 대한 20만 달러 투자는 몇 년 후에 800만 달러의 가치가 됐다. 하이저는 Allstate 자본의 4%만 투자하면서도 Allstate Insurance 총이익의 50%에 달하는 수익을 창출했다. 하이저가 Allstate Insurance에서 7년 동안 집행한 투자는 연평균 수익률이 43%에 달했으며, 결국 벤처투자가 Allstate Insurance의 가장 큰 사업모델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벤처투자가 크게 성공하면서 Allstate Insurance 내부 직원과 벤처캐피탈 간의 성과급 배분의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하이저는 성과급 보상 문제가 Allstate Insurance 회사 조직 내에서는 해결될 수없는 문제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하이저는 5,000만 달러를 모집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뛰어난 투자 성과를 기록한 덕분에 8,100만 달러를 단기간에 모집했다.9) Heizer Corporation은 리미티드 파트너십의 형태가 아닌 BDC(Business Development Corporation) 형태로 조직됐는데 이것은 위험을 피하려는 기관 투자자들에게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조직의 형태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까지 하이저는 ‘Amdahl’, ‘Commodore Corporation’, ‘Data 100 Corporation’, ‘Fotomat’, ‘Material Sciences Corporation’, ‘Spectra Physics’ 등 32개 기업에 1억 2,100만 달러를 투자했다.10) 1980년대 초 Heizer Corporation은 공개 시장에 상장됐고 1986년에는 결국 여러 기업으로 분할됐다.

Heizer Corporation은 다양한 기업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라는 업적 이외에도 기관 투자자들이 벤처투자를 위해 많은 자본을 투자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Heizer Corporation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Business Development Corporation 형태의 벤처캐피탈은 향후 벤처캐피탈 시장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9) 12개의 보험회사(Allstate 제외), 6개의 상업은행, 2개의 투자은행, 그리고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Stanford University, State of Wisconsin Investment Board, University of California, University of Chicago, The University of Rochester endowments 등의 많은 기관 투자자가 Heizer에 투자를 했다.
10) 당시 다른 포트폴리오 회사로는 Beverly Enterprises, Federal Express, Nortec Electronics, a digital watch company, Precision Instrument, Southwest Airlines, Vilcor, Federal Express, Southwest Airlines 등이 있다.

또 다른 메가 펀드는 1969년 5,150만 달러를 모금한 뉴욕에 본부를 둔 유럽 로스차일드 계열의 New Court Private Equity Fund(NCPEF)였다. NCPEF의 주요 자금 공급원들은 IBM, AT&T, RCA와 같은 대기업들의 개인연금이었다. NCPEF는 Heizer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조직됐는데 그 이유는 투자자들이 그러한 형태에 더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NCPEF는 1974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으로 조직을 변경해 관리보수 2%, 성과보수 20%를 받았다. NCPEF는 Federal Express와 Amgen에 최초 투자를 했고, 이후 Cray Research와 Tandem Computers의 자금조달에도 참여했다. NCPEF의 성공은 1981년 로스차일드 일가가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고 NCPEF의 이름을 Rothschild, Inc로 바꾸고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중단됐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Charles Lea와 그의 동료인 John Birkelund는 NCPEF를 떠나 새로운 벤처캐피탈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을 결성했다.

Heizer Corporation과 NCPEF는 기존과 다르게 기관 투자자의 자금을 가지고 매우 높은 성공을 거두어 벤처투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기관 투자자들은 개인 투자자들과 달리 오랜 기간을 인내하며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벤처캐피탈 펀드는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주식 시장의 침체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Figure 1  Total venture capital invested and funds committed to limited partnerships

이 기간 동안 벤처캐피탈 업계와 투자자들에게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이 매력적인 조직 형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11)

11)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세법상 Limited Partnership은 조합과세를 받기 때문에 법인세가 없이 투자자에게 배당금이 온전히 지급됐으며, 만약 투자자들이 개인세금을 면제받으면 전혀 과세가 없었다. 둘째로, GP는 급여와 비용을 포함한 관리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과보수를 통해 시세차익을 LP와 공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큰 성공을 거둔 경우에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게 했다. 셋째로, Limited Partnership을 통해 벤처캐피탈들이 LP들로부터 관리수수료를 받는 것은 포트폴리오 기업들이 벤처캐피탈 회사에 별도의 배당이나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도록 했다. 넷째, LP는 GP의 결정에 간섭할 능력이 없어 펀드 운용에 있어 GP에게 많은 자율성이 부과됐다. 다섯째, Limited Partnership의 주요 LP인 기관투자자들은 장기 수익에 관심이 있었고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 벤처캐피탈에 대해 배당이나 이자 지급을 압박하지 않았다. 여섯째, 각각의 Limited Partnership은 7년에서 10년 사이의 제한된 수명을 가졌고 그 후 청산됐는데, 이러한 청산은 GP와 LP 모두에게 주기적인 변화를 촉진했다. 일곱 번째, 펀드는 단 한 번만 투자됐고 모든 수익금은 즉시 투자자들에게 분배됐다. 마지막으로, Limited Partnership의 라이프 사이클을 포트폴리오 기업의 라이프 사이클과 일치시킬 수 있었다.

벤처캐피탈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SBIC가 아닌 벤처캐피탈은 규제 활동, 정치 로비 등에 SBIC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벤처캐피탈들이 잘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4월, ‘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이하 NVCA)’라는 전국 벤처캐피탈을 대변할 수 있는 협회가 Heizer Corporation 사무실에서 출범했다. NVCA의 첫 번째 목표는 ERISA 제한을 완화해 벤처캐피탈 펀드의 자금 흐름을 늘리는 것이었다. 벤처캐피탈업계는 5년간 집중적인 로비를 통해 1978년 ERISA 법을 개정하도록 노동부를 설득해 전문적으로 운용되는 벤처캐피탈펀드에 대한 투자를 허용하게 했다.
ERISA 규정의 개정은 벤처캐피탈업계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연금펀드의 벤처투자 수치가 1978년 3,200만 달러에서 1984년 10억 8,500만 달러까지 급증했다. 이와 더불어 1978년 의회가 자본 이득 세율을 50%에서 28%로 낮춤으로써 1980년대 초 벤처캐피탈 시장이 급성장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됐다.

❻ 1980년대: 벤처캐피탈시장의 성숙화

1980년대 초는 놀라운 벤처투자 기업 IPO의 연속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벤처투자 중 하나는 1980년 10월에 공개돼 3,500만 달러를 모금한 Genentech이었는데, 이 회사의 주식은 개장일에 두 배로 증가했다. 또한 1980년 12월, Apple Computer는 주식을 상장해 일반에 팔았고 회사의 기업가치는 전례없는 17억 달러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후 1981년 3월, 또 다른 생명공학 회사인 Cetus는 상장돼 1억 7백만 달러를 모집했으며, 계속해서 3Com은 1984년에, Sun Microsystems와 Oracle은 1986년에 공개시장에 상장됐다. 벤처캐피탈 자금이 투자된 기업들의 주가 상승은 모두에게 그 수익성을 입증했는데, 이러한 IPO의 지속적 흐름과 초기 투자자에 대한 막대한 수익은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였으며 성공적인 벤처캐피탈들과 그들의 포트폴리오 회사들이 획득한 자본 이득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하지만 이 기간의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 수익은 일부의 것이다. 실리콘밸리 기업가 정신을 다룬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1974년 첫 펀드에서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와 토마스 퍼킨스(Thomas Perkins)는 800만 달러를 모금해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연평균 39%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두 명의 새로운 파트너를 추가한 두 번째 펀드는 1978년에 1,500만 달러를 모금했고 처음 5년 동안 연평균 83%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또한 1980년에 모금된 5,500만 달러의 세 번째 펀드는 처음 8년 동안 연평균 65%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다른 벤처캐피탈 펀드들도 매우 높은 연간 수익률을 달성했으며, 이러한 수익으로 더욱더 많은 자본과 능력 있는 개인들이 벤처캐피탈 시장에 몰려들게 됐다. 1980년대 이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모델은 벤처캐피탈 투자를 조직하는 지배적인 모델이 됐다. 실제로 1984년에 총 163억 달러가 조성된 벤처캐피탈 자금의 72%가 독립된 벤처캐피탈 기업들에 의해 관리됐으며, 이중 대부분의 벤처캐피탈 펀드는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였다.12)

자료 : Hervé Lebret, “A History of Venture Capital”, 2007.1.4

이 시기에는 벤처캐피탈 자체가 대중 매체에서 큰 이슈로 떠올랐다. 1981년 3월 9일 Genentech의 창업자인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 교수가 주간지 타임의 표지에 실렸으며, 1982년 2월 15일에 애플의 스티브잡스가 그 뒤를 따랐다. 표지와 함께 이 기업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한 벤처캐피탈을 눈부신 찬사로 수식한 특집 기사들이 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벤처캐피탈 시장에서 가장 이슈는 1984년 1월 23일 Fairchild와 Intel 금융을 주선했던 벤처투자가 아서 록(Arthur Rock)이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을 때였다. 벤처캐피탈은 현재에도 미국 내에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단어가 됐다.

12) Venture Economics, Inc., “The Venture Capital Industry: Opportunities and Considerations for Investors. Wellesley Hills”, MA., 1985.

 Table 3  Venture capital investment; various years and various states by percentage and totala

자료 : Florida, R., D. F. Smith and E. Sechoka (1991), ‘Regional patterns of venture capital investment,’ in M. B. Green (ed.), Venture capital: International Comparisons. Routledge: London, UK.

벤처캐피탈의 발전으로 인해 전자, 통신 및 바이오메디컬 분야에서 미국 혁신의 지리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1960~70년대 가장 권위 있는 산업 연구소는 동부 해안과 산업 중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실리콘밸리로 점차 이동했고 당시 미국 벤처투자액의 30%를 실리콘밸리가 차지하게 됐다. 미니애폴리스의 ‘Norwest Venture Partners of Minneapolis’, ‘Morgenthaler Ventures of Cleveland’의 ‘Morgenthaler Venture’와 같은 다른 상위 벤처캐피탈 회사들은 1980년대에는 실리콘밸리에 지점을 개설하고 1990년대에 벤처투자 사업체를 실리콘밸리로 이전했다. 이후 연이어 벤처투자가 성공하면서 기업가들과 벤처투자가들 사이의 투자 계약은 점점 더 표준화됐고, 양 당사자에 대한 제약의 구속력은 약화됐다. 이것은 기업가와 벤처투자가들이 지역 변호사들의 매개체를 통해 좀더 유연한 계약을 하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과 벤처캐피탈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혁신 시스템이 제도화됐다.

❼ CVC 등장 및 성장

벤처캐피탈의 발전으로 인해 전자, 통신 및 바이오메디컬 분야에서 미국 혁신의 지리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1960~70년대 가장 권위 있는 산업 연구소는 동부 해안과 산업 중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실리콘밸리로 점차 이동했고 당시 미국 벤처투자액의 30%를 실리콘밸리가 차지하게 됐다. 미니애폴리스의 ‘Norwest Venture Partners of Minneapolis’, ‘Morgenthaler Ventures of Cleveland’의 ‘Morgenthaler Venture’와 같은 다른 상위 벤처캐피탈 회사들은 1980년대에는 실리콘밸리에 지점을 개설하고 1990년대에 벤처투자 사업체를 실리콘밸리로 이전했다. 이후 연이어 벤처투자가 성공하면서 기업가들과 벤처투자가들 사이의 투자 계약은 점점 더 표준화됐고, 양 당사자에 대한 제약의 구속력은 약화됐다. 이것은 기업가와 벤처투자가들이 지역 변호사들의 매개체를 통해 좀더 유연한 계약을 하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과 벤처캐피탈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혁신 시스템이 제도화됐다.

 그림 1  CVC 투자 규모

자료 : PitchBook(2019)

13) Jennifer S. Fan, “Catching disruption: Regulating Corporate venture capital”, Columbia Law Review, vol. 2018.

네 번째 단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금융위기 이후 CVC 산업은 전통적인 벤처캐피탈 투자보다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1,200개 이상의 기업이 CVC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절반 이상이 2010년 이후 설립됐다. 또한 2012년~2016년에 CVC의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20년 동안 미국에 기반을 둔 CVC의 투자는 17배나 증가했다. 또한 2018년 미국 총 벤처캐피탈투자(Deal)가 1,310억 달러인데, 이중 CVC 투자는 696억 달러로 CVC 투자가 총 벤처캐피탈 투자 중 53%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14)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최신 혁신을 따라잡기 위해 CVC 설립을 선택하고 있다. CVC 설립의 가장 큰 장점은 모기업의 전문 지식, 네트워크를 활용해 신사업의 규모를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CVC는 순수하게 재무적 이익에 초점을 맞춘 벤처캐피탈기업과는 다르게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림 2  투자 단계별 CVC 투자 횟수

1980년대 초창기 CVC는 창업 후기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또한 이사진을 선임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CVC를 통해 창업 초기 단계에 투자를 하며 이사진을 선임해 모든 창업 단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15) CVC는 더 이상 실험이 아닌 새로운 벤처캐피탈 투자 방식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14) PitchBook, “2019 YearBook”, 2019, p.31.
15) Sesame Street, Walgreens, 7-Eleven, General Motors, and Campbell Soup 등과 같은 회사는 최근 미국 CVC의 시장에서 Google과 Intel과 같은 10대 기업들에 합류했다.

03

결론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만이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어떻게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할 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중소기업 자금 조달의 주요 수단이었던 은행이 고위험투자군이었던 중소기업 투자를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중소기업은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어렵게 기술 개발을 했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록펠러와 같은 부유한 기업가의 집안에서 펀드를 조성해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에 투자를 했지만 지속적인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1940년대 후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기업의 경영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 자금 조달 기관인 벤처캐피탈이 탄생했다. 당시 벤처캐피탈은 회사 형태로서, 현재와 같이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은 아니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은 당시 소련과의 우주항공 산업의 개발 경쟁에 나서면서 DARPA를 통해 우주항공과학 기술 중소기업 R&D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의 고속 성장을 주도한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이 탄생한 것은 이 시기에 전폭적으로 이뤄진 기술 개발의 투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68년 미국 정부는 SBIC라는 투자기구를 만들어 중소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는데 정부가 이 투자를 보증하는 형태로 중소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SBIC는 공공자금에 대한 도덕적 해이와 이로 인한 규제 증가로 중소기업에게 지속해서 자금을 공급하지는 못했다. 1961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새로운 벤처캐피탈가 설립됐는데 이는 기존 회사 형태의 벤처캐피탈과 달리 투자자와 투자받는 기업 모두가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매우 우수한 형태의 조직으로 당시 기관 투자자의 큰 호응을 받아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관 투자자가 벤처캐피탈 시장의 주요 LP 투자자로 등장하면서 벤처캐피탈 시장은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1980년대에는 CVC 형태의 벤처캐피탈이 중소기업에 많은 자금을 공급하게 되는데 이는 모기업이 직접적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형태의 자금 공급원이 됐다. 또한 CVC는 M&A 회수시장을 활성화하여 궁극적으로
미국 벤처생태계를 선순환 구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와 같은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현 벤처캐피탈산업에 적용할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도 기술 중심 산업에 집중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미국과 같이 민간 중심의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미국도 1970년대 국방부의 대규모 국방기술지원 자금을 바탕으로 벤처캐피탈산업이 성장했듯이 우리나라도 R&D 산업에 좀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벤처투자(KVIC)의 모태펀드를 통해 4차 산업펀드를 조성하고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로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AI, 로봇, 빅데이터 등의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집중된 대규모의 펀드를 조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미국 벤처캐피탈 시장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CVC를 국내에도 활성화해야 한다. 모회사가 자회사인 벤처캐피탈을 통해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 미국과 같이 CVC의 모기업에 기술 기업을 매각한 창업자는 재창업을 하거나 시장에서 벤처캐피탈 및 엑셀러레이터의 역할을 하며 새로운 창업자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 또는 그 자회사가 벤처캐피탈(창업투자회사 등)의 지분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CVC 활성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국회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2019년 6월 10일 일반지주회사 또는 그 자회사가 벤처캐피탈(창업투자회사 등)의 지분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발의됐다.16) 우리나라에서도 CVC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이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할 것이다.

16) 김병관 외 10인, “[2020891]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2019.6.10

03

결론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만이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어떻게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할 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중소기업 자금 조달의 주요 수단이었던 은행이 고위험투자군이었던 중소기업 투자를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중소기업은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어렵게 기술 개발을 했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록펠러와 같은 부유한 기업가의 집안에서 펀드를 조성해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에 투자를 했지만 지속적인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1940년대 후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기업의 경영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 자금 조달 기관인 벤처캐피탈이 탄생했다. 당시 벤처캐피탈은 회사 형태로서, 현재와 같이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벤처캐피탈은 아니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은 당시 소련과의 우주항공 산업의 개발 경쟁에 나서면서 DARPA를 통해 우주항공과학 기술 중소기업 R&D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의 고속 성장을 주도한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이 탄생한 것은 이 시기에 전폭적으로 이뤄진 기술 개발의 투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68년 미국 정부는 SBIC라는 투자기구를 만들어 중소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는데 정부가 이 투자를 보증하는 형태로 중소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SBIC는 공공자금에 대한 도덕적 해이와 이로 인한 규제 증가로 중소기업에게 지속해서 자금을 공급하지는 못했다. 1961년 리미티드 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형태의 새로운 벤처캐피탈가 설립됐는데 이는 기존 회사 형태의 벤처캐피탈과 달리 투자자와 투자받는 기업 모두가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매우 우수한 형태의 조직으로 당시 기관 투자자의 큰 호응을 받아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관 투자자가 벤처캐피탈 시장의 주요 LP 투자자로 등장하면서 벤처캐피탈 시장은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1980년대에는 CVC 형태의 벤처캐피탈이 중소기업에 많은 자금을 공급하게 되는데 이는 모기업이 직접적으로 중소기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형태의 자금 공급원이 됐다. 또한 CVC는 M&A 회수시장을 활성화하여 궁극적으로
미국 벤처생태계를 선순환 구조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와 같은 미국 벤처캐피탈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현 벤처캐피탈산업에 적용할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도 기술 중심 산업에 집중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미국과 같이 민간 중심의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미국도 1970년대 국방부의 대규모 국방기술지원 자금을 바탕으로 벤처캐피탈산업이 성장했듯이 우리나라도 R&D 산업에 좀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벤처투자(KVIC)의 모태펀드를 통해 4차 산업펀드를 조성하고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로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AI, 로봇, 빅데이터 등의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집중된 대규모의 펀드를 조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미국 벤처캐피탈 시장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CVC를 국내에도 활성화해야 한다. 모회사가 자회사인 벤처캐피탈을 통해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M&A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 미국과 같이 CVC의 모기업에 기술 기업을 매각한 창업자는 재창업을 하거나 시장에서 벤처캐피탈 및 엑셀러레이터의 역할을 하며 새로운 창업자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 또는 그 자회사가 벤처캐피탈(창업투자회사 등)의 지분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CVC 활성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국회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2019년 6월 10일 일반지주회사 또는 그 자회사가 벤처캐피탈(창업투자회사 등)의 지분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발의됐다.16) 우리나라에서도 CVC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이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할 것이다.

16) 김병관 외 10인, “[2020891]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2019.6.10

참고문헌

• 김병관 외 10인, “[2020891]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2019.6.10.

• Hayes, S. L. and D. H. Woods, “Are the SBICs doing their job?”, Harvard Business Review, 6(15), 178–196., 1963.

• Jennifer S. Fan, “Catching disruption: Regulating Corporate venture capital”, Columbia Law Review, vol. 2018.

• KPMG, “Venture Pulse Q1 2019 – Global analysis of venture funding”, 2019.4.11.

• Martin Kenney, ‘How venture capital became a component of the US National System of Innovation’, 2011.

• PitchBook, “2019 YearBook”, 2019, p.31.

•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SBVCA), ‘Encouraging venture capital for small business,’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New York., 1967.

• Venture Capital Journal, “SBICs after 25 Years: pioneers and builders of organized venture capital”, Venture Capital Journal, October, 6–12., 1983.

• Venture Economics, Inc., “The Venture Capital Industry: Opportunities and Considerations for Investors. Wellesley Hills”, MA., 1985.

참고문헌

• 김병관 외 10인, “[2020891]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2019.6.10.

• Hayes, S. L. and D. H. Woods, “Are the SBICs doing their job?”, Harvard Business Review, 6(15), 178–196., 1963.

• Jennifer S. Fan, “Catching disruption: Regulating Corporate venture capital”, Columbia Law Review, vo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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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tchBook, “2019 YearBook”, 2019, p.31.

•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SBVCA), ‘Encouraging venture capital for small business,’ Small Business and Venture Capital Associates. New York.,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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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nture Economics, Inc., “The Venture Capital Industry: Opportunities and Considerations for Investors. Wellesley Hills”, MA., 1985.

2019-07-30T14:03:40+09:00